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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71. <태사공>도사공휘돈선행장(道士公諱墩善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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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태사공>부천거사휘장섭행장(釜川居士諱章燮行狀)
釜川居士諱章燮行狀 公諱章燮字基炫號釜川父東俶祖元泳曾祖就錫壬辰殉節縣監公諱愈十二世孫也 哲宗辛未正月十六日生公而純厚淨大以孝悌廉恥爲家箴而不好論人長短性又嚴毅不苟合於人尤不喜博奕笑郎公早丁外艱事慈妣以孝定省不闕奉養極臻少受業于馬巖喜大學之書而言語必誠動必與諧微無失馬巖甚親愛之家素貧窘無以餘暇帶大學一篇而畫耕於釜川之陽暮歸讀而復織席戒子弟諄諄不專爲華飾每對人歎世態之倫理壞絶以利爲利之害甚於栽奪矣門人子弟三十餘人日益進學公雖窘艱專不受東修之例當世之嘲笑曰湯盤云曰日日新胡不從新式而謀財固執古法而終貧窮聾啞兮腐儒云矣 高宗辛丑與族弟維燮會于馬巖齎慨歎宣祖考縣監公父子忠義雖上無褒功下無表石作傳于今則於子孫之道不可也齊力而加石焉實吾趙之門惟公三人而己以乙丑十一月二十六日卒馬巖公聞而哭之曰章燮之死也吾門之不幸痛之如此矣配文氏南平人父榮根江城君益漸后亦有婦德育二男二女長男曰喆錄次曰喆泓女歸李鍾昕宋國孝皆名族也拘時禁權窆于宅之東 原大朞後三月公之子喆錄喆泓幷起而請余曰吾兄弟皆淺薄識見而先府君懿德莫傳族兄想應知之矣幸而惠焉記之余牢辭拙陋不能粧言潤色然余亦於公間間有受悔飭故懿德篤行余己知之狀其行者實記也略記如右以待立言君子察焉謹狀 歲戊辰二陽月 日 부천거사휘장섭행장(釜川居士諱章燮行狀) 공의 휘는 장섭(章燮)이요 자는 기현(基錄)이며 호는 부천이었다。 부는 동숙(東俶)이요 조는 원영(元泳)이며 증조는 취석(就錫)이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순절(殉節)한 현감공 휘 유(愈)의 十二세 손이었다。 철종신미(哲宗辛未)년 정월 十六일 공이 출생하여 성품이 순후 정대하고 효제 염치로써 가규를 삼아 사람의 장단(長短)를 말치 아니하며 동지(動止)가 안상(安詳)하여 구차이 사람에게 영합(迎合)치 않고 더욱 잡희(雜戲)를 좋아 아니하였다。 일찍 부친을 잃고 모친을 효도로 섬기며 문안과 봉양을 극진히 하고 젊어서 마암(馬巖) 공께 수학하며 대학을 좋아하여 말을 반드시 성실하고 움직일 때 손에 책을 놓지 아니하니 마암공이 심히 사랑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여가가 없으므로 항시 대학을 휴대하고 낮에는 부천(釜川)의 남쪽에서 갈며 저물게 돌아와 읽고 또 자리 짜며 자제를 거듭 거듭 경계하되 하려하게 사치말라 하고 三강과 五륜이 해이함을 사람을 대하여 한탄하며 도덕을 멀리하고 이끝을 숭상한 해독이 심하다 하였다。 자제와 촌수(村秀) 三十여인이 수학하니 공이 비록 가난하되 학채(學債)를 받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이 조소(嘲笑)하되 대학에 일일신(日日新)이라 하였는데 어찌 신식을 따르지 않고 구학을 고집하여 마침내 빈곤하니 참 썩은 선비라 하였다。 一九○一(高宗辛丑)년에 족제 유섭(維燮)과 함께 마암재(馬巖齎)에 모여 현감 선조고부자 충절에 대하여 국가의 장포를 받지 못하고 또 비돌에 새겨 전치 못함을 개탄하여 힘을 모와 비를 세웠다。 을축(乙丑)년 十一월 二十六일에 졸하니 마암공이 듣고 울며 가로되 장섭(章燮)이 죽은 것은 우리 문중의 불행이라 하였다。 배 남평문씨 영근녀(配南平文氏榮根女)는 강성군 익점(江城君益漸) 후손으로 부덕이 있고 二남二녀를 두었는데 남은 철록(喆錄) 철홍(喆泓)이요 녀는 이종흔(李鍾昕) 송국효(宋國孝)처며 다 명족이었다。 시금(時禁)에 걸여 집 뒤 동산에 권폄(權窆)하고 대상 뒤 三월에 철홍 형제가 내게와서 장문을 부탁하며 우리 형제가 무식하여 선부군의 아름다운 덕을 전치 못함을 족형이 이미 아는 바니 재택해달라 하였다。 내가 우졸하여 말을 꾸며 빛을 낼 수 없으나 공에게 간간히 교훈을 받았는고로 아름다운 덕과 착한 사행을 잘 하는지라 행장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므로 대략 이상과 같이 기록하여 말을 바로한 군자의 바른 붓을 기다림。 근장(謹狀) 戊辰陽二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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